흙은 생명의 기원(基源)이다
땅은 흙이고 흙은 만물을 살리는 바탕으로 우리는 흙에서 태어나서 흙 위에서 삶을 구가하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흙을 떠나서는 살수 없고 생명이 붙어있는 모든 것이 흙에서 삶을 영위한다.

흙이란 암석에서 떨어져 나간 무기물과 동식물에서 생긴 유기물 그리고 결합수가 작은 입자로 모여 80여종 이상의 원소로 이뤄졌으며 이중에서도 규소가 전체의 50%이상을 차지하며 규소는 사람으로 치면 등뼈 같은 성분으로 탄소와 같이 손이 네 개로 두 손으로 서로 붙잡고 있으며 나머지 두 손으로는 모든 것을 잘 붙잡는다.

모든 생물이 흙에서 태어난 것은 주성분인 규소가 탄소로 변했기 때문이며 탄소가 없었다면 모든 동식물이 생겨나지 못 했을 것이다. 만약에 규소가 탄소로 바뀌지 않고 규소가 생명의 근간이 되었다면 인간의 수명은 지금보다 수배 아니 수십 배까지도 가능해졌을지도 모른다.

구약성서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흙을 빚어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를 만들고 그 코에 입김을 불어넣어 생명을 부여했다고 기록되었다.

아무튼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는 성경말씀은 과학적으로 진리며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만들었다고 한 이 한부분만은 성경과 과학이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어떻든 인간이 창조 되었건 진화 되었든지 흙이라는 점에는 공동점이 있으며 인간은 흙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믿는다.


땅은 영원하다
자연계의 현상은 얼핏 보면 아주 복잡하지만, 자세히 들어다 보면 그 속에는 조물주의 오묘한 섭리에 의해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이 돌아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조물주는 땅에서 사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식물 그리고 보이지 않는 미생물까지 모두가 함께 살아 갈수 있는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을 주었다.

식물은 탄소를 이용해 광합성에 의해 당을 만들고 질소는 동화작용에 의해 아미노산으로 생합성 하여 밤에 뿌리에 저장하였다가 일부를 미생물에게 되돌려 주며 미생물은 다시생리활성 물질을 내 보내 준다. 미생물에게도 탄소와 질소가 필요하다 질소로 몸을 만들고 탄소는 활동하는 에너지로 사용한다.

인간은 단백질을 만드는 능력이 없다 따라서 동식물을 섭취하여 그 단백질을 이용하여 자신의 몸을 만든다.

생태계에서 인간과 동물은 소비자라고 할 수 있으며 식물은 생산자 미생물은 분해자 즉 조절자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각자 분업에 의해 생태계는 동물과 식물 그리고 미생물에 의해 끊임없이 순환하며 서로 관계를 맺는 것으로 집약된다 할 수 있다.

생명이란 이렇게 자연의 균형과 조화에 의해 탄생하고 유지되며 진화한다. 모든 생명은 흙을 떠나서는 생각 할 수 없으며. 땅은 태산을 받치고 바다를 품고 있어 영원하기에 우리가 땅이 꺼질 것을 근심하며 사는 생명은 없다


흙은 소우주이다.
흙속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우리가 상상했던 그 이상의 넓은 세계 즉 소우주를 발견 하게 된다
땅속에서는 수많은 곤충과 미생물들의 약육강식이 벌어지고 있다.

곤충과 곤충. 미생물과 미생물 그리고 곤충과 미생물간의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 이들의 세계는 정지된 세상 같지만 이렇게 서로 전쟁을 펼치는 소우주라고 할 수 있다.

미생물은 미생물군과 또 다른 미생물군 간의 끊임없이 경쟁하며 선충은 주사기 같은 입으로 곰팡이를 잡아먹지만 역으로 곰팡이도 진즉진즉한 고리를 만들어 선충을 죽여 이렇게 서로 간의 견제하는 적절한 조화 즉 서로간의 길항관계 때문에 생태계는 유지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땅위에서도 모든 동물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이는 처절한 약육강식이란 자연의 법칙에 의해 존재관계가 성립하며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양 속담 중에 "흙은 풀을 길러내고, 풀은 가축을 기르고, 가축은 인간을 기른다"라는 말이 있다. 풀, 가축, 인간은 각각 독자적으로 영양을 흡수하지만 결코 독립되어 있지 않아 그들 사이에는 영양소의 흐름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죽어버리면 몸을 구성하고 있던 원소는 흙으로 돌아가 다시 자연계를 순환한다.


흙도 안식을 원한다.
인간은 만물을 지배하고 만물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중심의 생각이다.

과학이 인간에게 끼친 영향은 가히 상상하지 못 할 정도로 풍요를 가져 왔지만 그러나 그 역풍도 심각하다.

농업이란 과학의 힘을 빌려 자연을 길들이는데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과학의 힘을 빌려 점차 자연을 벗어나 한정적이고 획일화 된 조건 하에서 땅을 휴식 없이 같은 작물을 같은 장소에 계속 심을 때에는 화학비료와 화학합성농약을 피할 방법이 없다.

화학농약은 미생물에게는 핵폭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토양 내에서 이화학성의 변화를 초래하여 유익균보다는 해로운 균만 증가하여 미생물상의 변화가 일어나 뿌리섞음병 등 토양병해가 발생하며 또한 잦은 화학비료의 살포는 토양 내 비료성분의 과다한 집적과 토양의 산성화를 초래해 연작피해가 발생한다.

그래서 좋은 농사꾼은 밭을 바꾸어 씨를 뿌리거나, 밭으로 하여금 휴식년을 주어 묵힌다. 미국의 밀 생산지에서는 넓은 면적을 나눠 밀을 심은 곳과 심지 않은 곳이 반반씩 있다. 이것은 대량생산으로 인한 곡물가격 폭락을 막는 것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땅심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흙은 어머니다.
흙은 모든 생명들을 감싸고 있는 어머니로 수많은 생명을 품은 자궁이라 할 수 있다.

건강한 흙 한줌에는 수억의 생명을 품고 있으며 100만종이 넘는 곤충의 95%가 흙속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알을 낳고 부화하여 번식을 하며 생활도 하지만 이 속에서는 사냥도 하는 드라마틱한 약육강식의 전쟁이 쉬지 않고 일어나 서로 먹고 먹히면서 흙에게는 양분을 공급할 뿐 아니라 흙을 숨 쉬게 하며 모든 생명에게 은신처를 제공한다.

흙은 식물과의 상호관계 등 매우 중요한 역할을 통해 하나의 씨앗을 품으면 수십 배로 돌려주는 은혜로운 존재로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땅은 태초에 하늘에 의해 수태하여 창조되었으며 하늘이 아버지라면 땅은 어머니다. 동양에서는 모든 사물을 양과 음으로 나누어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라고 하였으며 실제로 흙은 95% 이상을 전기적으로 음성(-)의 성질을 갖고 있어 과학적으로도 흙은 여성이다.

까닭에 남성적 하늘에 대한 배우자로서의 흙은 여성적 대지가 되기도 하다. 내가 디디고 사는 땅은 만고에 듬직하여 아버지와 같고 영원히 인자한 어머니와 같아 항상 포근하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
모든 생물은 동물과 식물로 나누며 이들은 서로 대조적인 존재지만 생활에는 기본적인 구조가 있으며 서로 유기적인 관계위에 동물과 식물로 구분되고 있다.

흙 위에서 생명을 영위하고 있는 모든 동식물의 외견상 가장 큰 차이는 동물은 좋은 환경을 구하여 살 수 있지만 식물은 그렇지 못하며 인간은 몸을 구성하고 있는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을 스스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동식물에 의존하여 삶을 영위 할 수밖에 없다.

식물의 경우 맥이 일부 끊기거나 상하더라도 많은 종의 나무는 자신의 뿌리나 줄기로 자신과 동일한 유전자의 '클론'을 생산할 수 있어 삽목이나 분주 등 자기 복제를 통해 영생을 누리지만 동물은 중요 장기가 상하거나 끊어지면 죽음이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미래학자들은 인간도 머지않아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도 앞으로 3-4십년 후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속에 수십억 개의 미세한 나노 로봇이 들어가 노화를 막으며 또 인간의 지능과 능력을 뛰어넘는 기계가 나와 인간과 결합하는‘사이보그 시대가 온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도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나아가 새로운 진화를 통해 영생을 누릴 수 있을까?

생명이 붙어있는 모든 동식물은 흙에서 태어나서 흙 위에서 삶을 영위하고 흙으로 돌아간다.
땅은 절대적 힘을 가진 수호신이다

하늘은 신앙적으로 절대적 힘으로 군림하고 지배하는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땅은 모두에게 생활의 터전을 주어 포용하며 무조건 베푸는 풍요로움으로 친화감을 느끼게 하는 은혜로운 안식처며 영원한 마음의 고향으로서의 정신적인 의미가 있다.

땅은 기복(祈福)의 대상으로 시골에서 자랄 때 흙을 밖으로 쓸어버리면 복이 나간다고 여겨 마당을 쓸 때면 집 안쪽으로 쓸어야 했으며, 땅을 일구어 먹거리를 장만하며 흙으로 지은 집에서 살아온 땅은 태어난 곳이자 되돌아 갈 곳이기에 이를 밟고 흙냄새를 맡으며 살아야 탈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설령 홍수와 가뭄 등 하늘의 횡포로 때로는 고통을 주어도 어차피 돌아가야 할 곳이기에 참된 마음으로 버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모든 삶의 아픔을 흙에 의지하며 살아 왔다.

이러한 생각들이 절실한 삶 속에 승화되어 한 치의 땅을 더 얻는다는 것은 곧 재물과 복을 얻는 일이며 한 치의 땅을 잃는다는 것은 삶의 한 부분. 즉 생명의 한쪽을 잃어버리는 것을 뜻하였다.

그래서 좋은 땅에 대한 욕심은 현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세에 까지도 연장하려는 집착으로 이어지고 있어 땅은 신앙의 대상으로 수호신이라 할 수 있다.


땅에는 소위 땅의 기란 것이 있다.
땅은 만물을 생성하는 기가 있으며 이 생기가 땅속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보았으며 이 땅의 기운이 인물을 낳고 길흉화복을 좌우한다고 하는 이 독특한 자연관 때문에 동양에서는 풍수지리학이 발전했다.

산 사람은 땅 위에서 살고 죽은 뒤에도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여 산 사람이 사는 곳을 양택이라 하고 죽어서 묻히는 곳을 음택이라 하고 땅속의 세계를 죽음의 세계로 생각하여 땅속에서 혼백이 올라온다고 믿어 생전의 업보로 인해 지옥(지하의 감옥)에 갇혀서 고통을 받게 된다고 여겼다.

물과 바람이 직접 범하지 않는 곳을 택해서 집을 짓고 묘를 만들었으므로 풍수지리라 하였으며 여기에서도 땅의 살아있는 생명력과 기운이 만물을 지배하고 산자나 죽은 자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생각한데서 풍수학이 천년이 넘는 세월을 우리 삶과 같이 했다고 하겠다.

오행(五行)에서는 생각하는 것이 ‘土’에 속하여, 생각 ‘思’의 한자는 밭 ‘田’ 밑에 마음 ‘心’을 붙인 것으로 마음의 밭을 갈아 다스린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동의보감에서는 흙의 성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질이 평(平)하고 맛이 달며(甘)며 독이 없다. 설사와 이질을 치료하고 각종 식중독에 좋다. 지표에서 석자까지를 분(糞)이라하고 그 아래 있는 것을 흙 이라한다. 약용으로 쓰이는 것은 물이 스며들지 않는 참흙을 말한다.>라고 했다 이렇게 흙이 간섭하고 있는 영역은 우리의 상상이상으로 아주 크고 넓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 몸이 서고. 앉고. 누운 자리가 모두 땅이다

나는 흙냄새를 좋아한다. 몇 달이고 바다 위에서 생활하다 육지로 돌아오는 선원은 먼 곳에서부터 흙냄새를 맡는다고 한다.

삼복더위에 더위를 식히려고 마당에 물을 뿌리면 순간적으로 토양미생물인 방선균으로 인해 흙냄새를 맡게 된다. 그러나 요즘의 모든 도로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었고 주거방식도 아파트로 점차 고층화되어 땅에서 멀어져 우리는 흙냄새를 맡지 못한다.

이순의 언덕에 첫 발을 내 디딘 요즈음 나는 일이 풀리지 않고 답답할 때는 반려견인 코코와 수를 데리고 아파트 산책로와 연결된 등산로를 따라 무년산에 올라 마실이라도 나온 것처럼 나무 그늘에 앉아 무심히 지나가는 새나 움직임이 없는 돌이랑 나무들을 볼 때마다 항상 새롭게 느껴지며 이들과 교감하는 삶을 체험하다보면 나도 자연의 일부로 존재함을 느낀다.

요즈음 나는 한 걸음 물러서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며 많은 심경의 변화와 세월의 무게를 느낀다.
내가 못한 일은 무엇이고 더 해야 할 일은 어떤 것인가?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보고 배운 것도 각자 달라 생각도 서로 다르겠지만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내 일의 진가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설령 잘못 선택한 길이라 할지라도 나는 오늘 이 일을 만족하고 내일을 위해서라면 오늘의 팍팍한 삶쯤은 어떻게 해서라도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간들 솔개가 바위에 낡은 부리를 쪼아 없애고 새부리를 나게 하어 그 새부리로 낡은 발톱과 헌 깃털을 뽑고 나서 다시 새 삶을 살듯이 이순에 접어 든 나는 흙냄새에 대한 그리움이 도시 삶에 대한 반작용으로 삶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타나 나는 요즈음 부쩍 흙냄새가 좋다.

우리가 언제나 듬직하고 가장 믿음직한 땅에서 태어나 믿음을 잊고 사는 인간이어서는 어찌 참다운 인간이라 하겠는가?

우리가 흙 위에서 사는 동안 흙의 믿음을 닮아 살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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